조각가 이행균의 홈페이지 | [비평]힘과 기술 세련미로 세우는 사실주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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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힘과 기술 세련미로 세우는 사실주의 탑

[비평]힘과 기술 세련미로 세우는 사실주의 탑

이행균 작품전
힘과 기술 세련미로 세우는 사실주의 탑

다른 장르와 달리 조각은 근기가 필요하다. 일테면 불에 달구고 두드려 물에 담그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더욱 강한 쇠가 되듯이 조각가는 오랜 시간의 단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천부적인 재주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먼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행균은 타고난 일꾼이다. 그러기에 조각은 그에게 일상사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그는 예술가연하지 않는다. 작업에 대한 예술작품으로서의 평가여부는 일단 자신의 손을 떠난 이후의 문제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오직 정해진 일과에 충실하는 것으로써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적어도 그의 작품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자기과시를 감지할 수 없다. 오직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견실한 작업이 결과할 뿐이다. 그러한 결과에 순응한다.
그는 인체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을 피한다. 순수한 누드 작품이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순수한 누드도 작업도 간혹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인체는 내용을 담는 수단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인체의 순수미는 그에게 매력적인 제재가 아니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우선하는 조형적인 접근방식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체는 정확한 해부학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묘사된다. 사실적인 묘사력에 관한 한 더 이상 주문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손의 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작업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작업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지 사실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이는 사실적인 형태묘사야말로 조각의 본질적인 힘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다. 실제로 그의 조각에서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사실적인 테크닉을 논외하고는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성립될 수 없다. 그가 한국조각계에 자리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치열한 장인정신에 의해 구현되는 정밀한 사실적인 테크닉에 있다. 스스로가 한국 사실주의 조각의 한 영역을 개척한 강관욱의 ‘수제자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대목에서 확고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사실적인 묘사력은 단순히 기능적인 완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정밀해질수록 형태미는 세련되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이미 단순한 손의 기능성을 뛰어넘는 세련미가 감지되고 있다. 기능적인 경계를 넘어서 조형적인 아름다움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세련된 미적 감각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 가운데 ‘애증의 덫(남>여)’ ‘애증의 덫(남>여)’ ‘두개의 나’ ‘사유체계의 부정’은 두 명의 인체를 병치시킨다든지, 나무 돌 따위의 이종 소재를 끌어들이는 식의 복합구조를 통해 인물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중적인 성격 또는 복합적인 사고기능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복잡한 심리적인 세계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인체의 내면을 탐조한다. 신체의 동세 및 얼굴표정 따위의 외부적인 형상은 내면세계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형식의 작업은 정신과 감정이 인체를 사역한다는 논리를 따른다. 즉, 내면과 연결되지 않는 외적인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해 가는 과정인 셈이다. 정신과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인체의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조형적인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喜’ ‘怒’ ‘愛’ ‘樂’(희노애락) 연작은 이와 같은 그의 시각을 명쾌하게 반영하고 있다. 감정이 지시하는 인간의 얼굴표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슬플 ‘哀’를 사랑 ‘愛’애로 바꾼 것은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처럼 조각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정세계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이들 감정표현에 중점을 둔 작품들은 실제공간을 점유하는 입체적인 존재로서의 강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극렬한 감정표현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시각적인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설득력이 강하다.
그런가하면 초상작품 형식을 따르는 ‘S씨 가족’ ‘우리 가족’ ‘꺼비’는 그가 새롭게 관심을 갖는 제재이다. 이들 작업은 자연스러운 표정 및 모습에서 회화적인 세부묘사에 필적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일루전에 의탁하는 회화와는 달리 보다 실제적인 형태를 가짐으로써 훨씬 호소력이 짙다. 하지만 돌로 초상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 초상조각으로 표현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것도 세부를 극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 테크닉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그는 회화만이 아니라 조각도 초상으로서의 형식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기념조각의 형식으로 제작되는 전통적인 초상작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경직된 양식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해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사실성이 강조되는 자연스러운 표정 및 자태를 지향하는 초상조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가족’과 ‘시쉬포스’는 부조인데 그가 새롭게 관심을 갖는 분야이다. 우리의 경우 기념조각의 한 부분으로서만 취급되고 있을 뿐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로댕의 지옥문에서 볼 수 있듯이 부조작업의 가치와 효용성은 실용적인 면에서도 적용할 소지가 많은 것이다. 그는 일단 초상조각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이번 작품전 준비를 하면서 ‘쓰레기통’이라는 명제의 추상작업을 병행하게 됐다. ‘怒’ ‘愛’ ‘애증의 덫’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즉 대리석조각들을 철사로 만든 원통 및 구체 모양의 통에 담아놓은 것이다. 이는 환경친화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독립된 추상작업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사실조각과의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특기할 일이다.
인체의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변형 왜곡하는 감각도 예사롭지 않다. 아름다운 비례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쪽 방향으로 관심을 집중하면 독자적인 조형성을 성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에게는 재능도 많고 주어진 과제도 많다. 하지만 아직 시간도 많고 힘을 충분히 축적하고 있으므로 점차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적인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 항 섭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