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내가 아는 이행균
내가 아는 이행균
민 형 기(조각가)
– 첫 만남에 대한 아련한 추억
대학 졸업 후 나는 줄곧 남는 시간들을 작업 공간이 마땅치 않아 모교 대학 빈 실기장을 자주 이용하곤 하였다. 낙도에 첫 발령을 받고 겨울방학을 맞아 작업을 하러 대학에 들렀는데 예비생인 듯한 모습의 젊은 청년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검은 점퍼차림에 웃음기를 약간 머금은 첫 인상, 물어보니 군복무를 마치고 예비 입학한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늦게라도 만난 것을 인연이라 생각하며 작업을 독려해주고, 졸업한 선배 입장으로서 작업방향이나 방법 등에 대해 나름대로 주섬주섬 소개해 준 적이 있다. 늦깎이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입학한 초년생에 다름 아닌 그와의 첫 만남이 작업실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신라 기마형 인물 토기”를 똑같이 재현한 것을 보고 사뭇 놀랐다.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기마형 인물토기를 공간을 비워가며 장신구까지도 디테일하게 테라코타 기법으로 제작한 것을 보고 손재주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 후 여름방학을 맞아 제 1회 한국 구상조각전 공모 작품 제작을 위해 학교를 찾았을 때 그는 더 성숙해 가고 있었다. 조각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면서 돌조각과 공모전을 준비하기도 하였으며, 대학 2, 3학년 때부터 한국 자생조각을 꿈꾸어 오신 조각가 강관욱 교수님의 영향으로 석조에 일찍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투각이 공존한 복잡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모습을 볼 때, ‘아! 돌도 참 잘 다루는구나’ 하는 공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가 돌을 잘 다루는 것은 타고난 면도 있었지만, 사실은 재학하는 4년 내내 학과 작업실을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같이 나와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가는 그의 꾸준한 성실함과, 아둔할 정도로 타협을 모르는 작업에 대한 그의 열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눈보라를 맞으며 2미터가 넘는 돌을 밤늦게까지 쪼는 그의 모습은 돌을 향한 인간노동의 숭고함과 그의 미래적 작가됨을 일찌감치 예견케 하였다. 학과 작업실만 가면 그가 있다는 믿음은 많은 학우와 주변인들로 하여금 작업실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한 의미를 심어주었고 작업사랑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그렇게 그는 졸업을 앞두고도 교직 발령보다는 작업에 열중하는 신념으로 작가의 길을 모색하는 남다른 꿈을 키우고 있었다.
– 졸업 후 그의 서울생활
졸업 후 그는 서울로 올라가 어렵게 생활하면서 작업과 홍익대 대학원 준비를 병행하는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다. 주물공장 생활, 돌공장 생활 등 어차피 삶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그로서는 전전긍긍하며 어려운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오직 조각을 해야겠다는 일념하나로 참고 감내하면서 서울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처럼 강한 의지를 가진 그라 할지라도 작업이 인생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라는 버거운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어느 해 추운 겨울에 그를 찾았다.
경기도 벽골제 부근에 허름한 시골집을 얻어 그동안 주물공장에서 배웠던 기술을 응용해 주물 브론즈를 만들어 보려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솥단지 같은 로에 쇳물을 끓인 흔적과 기포가 듬성한 주물형상을 보고 있노라니 참 어설퍼 보였다. 그 어설픔은 훗날 브론즈도 돌이구나 라는 확신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그에게는 척박하기만한 땅.
서울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그의 삶을 보고 있노라니 연민의 시선으로 다가왔다. 한 시대의 지인으로서 미래 인적자원으로 커왔던 교육자로서의 꿈을 버리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창작열을 불태우기 위해 많은 날들을 노력했던 것은 그가 가진 예술가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기에 가능했음을 짐작케 하였다.
– 청첩장에 그려진 그와 한 여인의 캐리커처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느 날 그로부터 결혼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청첩장에 그려진 그와 캐리커처화된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예식 사회를 보면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멀리 서울에서 광주까지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대학원 전뢰진 선생님과 대학시절 석조각을 전수해주신 강관욱 교수님이 동시에 참석해 주셨다. 전뢰진 선생님은 강선생님의 대학시절 은사님이시기도 했는데, 3대를 이은 조각가가 한자리에 모이는 의미 있는 장이기도 했다.
이사는 조각가가 겪어야 하는 과정중의 하나라 여겨진다.
우리 은사님도 그러셨고, 그 역시 작업여건에 따라 이곳저곳을 긍긍하며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겨야 했다. 지금은 경기도 광주 땅에 작업실과 안집을 지어 초등학생 다원이와 준석이, 그리고 캐리커처화된 여인 이렇게 네 식구가 오손도손 살고 있다. 마당에는 그가 직접 만든 그네와 미끄럼틀, 스프링으로 만든 재미난 흔들 목마 등 동네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자상한 아빠로서의 한 단면을 단박에 느끼게 한다. 그동안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온 그에게도 적지 않은 고민과 고통이 뒤따랐을 텐데 그는 어려운 조건들을 먼발치에서 삭여내는 자생능력 또한 탁월하게 지녔다.
– 어느 날 알고 보니 그의 고향이 곧 내 고향이었다
전라도하고도 남도의 끝자락쯤, 끝으로 내려오면 평지에 아름다운 남한의 금강산(월출산)이 우뚝 솟은 땅 영암, 신령스런 바위의 정기를 타고난 덕택에 그는 돌 다루는 재주가 뛰어났던 것일까? 영암하고도 산중에 자리한 금정이라는 곳은 내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며 꿈을 키웠던 가난하면서도 소박한 땅이다. 그의 선친들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지금도 일가친척들이 현존하고 있기에 그와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아주 어릴 적 금정에서 태어나 살다가 광주로 이사를 해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형들과 친지, 부모님을 통해 그에게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 그의 작품세계와 일상사
그는 다른 조각가와는 달리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각과 관련된 다양한 방면에서 쌓은 경험들을 자신의 작업세계에 매체로 끌어들여 활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돌을 다루는 솜씨는 탁월하다.
제1회 개인전에서 보여준 돌조각들은 상당한 열정과 과감한 조각가의 뚝심을 보여준 좋은 예가 되었다. 더군다나 고향인 광주에까지 끌고 내려와 선․ 후배나 동료, 동문들에게 선보여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회와 3회 전시를 거치면서 더욱 기법들이 다양해졌으며, 4회 전시는 돌의 종류에 따른 물성(物性) 파악을 통해 거의 원숙미에 가까운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의 여러 작품들 가운데 특히, 오석으로 제작한 “두개의 나”라는 작품은 찰흙으로도 표현이 어려운 기법들을 돌중에 가장 단단하다는 오석에 물광과 정발 및 굵은 터치를 적절하게 처리하여 완성도 높게 제작한점은 일련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 한다.
그리고 “AD2000년”은 푸른색 돌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손을 표현한 것인데 지문선과 손금, 핏줄의 섬세한 표현으로 가히 생동감을 주는 수작이라 여겨진다.
또한 로마조각에서 볼 수 있는 기법처럼 서로 다른 성질의 세 종류 돌을 접목하여 표현한“희(喜)”라는 작품은 ‘마치 돌을 흙 주무르듯하다’는 말을 웃고 있는 노인의 표정을 통해 듣는 것 같았다.
– 이번에 5회 개인전을 연다.
또 기대하며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
되뇌임속에 맴도는 “윤회와 무사유”라는 주제를 가진 대작들이 주류를 이룬다.
작가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서 얻은 체득된 경험과 영감들을 한층 더 걸러내 내면의 카타르시스를 시도한다고 보여 진다.
작업은 늘상 자신의 이력이며 삶의 자욱처럼, 이번 작품들도 그가 지금까지 삶에 눈뜨고 깨닫는 과정에서 얻어진 농축된 사유의 궤적과도 같다 하겠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무사유”란 곧 사유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인간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그저 이 순간이 버거워도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과 “인간사랑”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화두를 던지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작품성이 중견의 반열에 녹아 세월의 흔적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며, 동료 조각가이자 선배로서 진심어린 애정을 담아 작품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