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삶의 발견, 따듯한 리얼리티의 조형- 이행균의 조각언어
삶의 발견, 따듯한 리얼리티의 조형- 이행균의 조각언어
김종길 | 미술평론가
조각가를 ‘장인’이라 부르는 것은 이제 현재성이 없다. 탁월한 기능인 이상의 의미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연륜과 그 시간성에서 발산되는 우수한 예술성을 동시에 갖는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대 하나의 ‘경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 기계문명의 진화가 고속화되는 시대에 장인의 가치는 그래서 더 중요하고 필요한게 아닌가 한다.
전덕제와 이행균의 작업을 보면서 떠 오른 것은 솔직히, 장인의 손맛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필자의 인식이 구태연하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돌만을 고집한 채 수십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들의 작품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조형을 완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작업장 자체가 거대한 자궁과 같기 때문이다.
돌 조각은 노동이다. 노동을 말하지 않고 돌 조각을 이해하기 힘들다. 돌의 노동은 몸으로부터 온다. 몸의 노동은 전신성을 요구한다. 즉 온 몸의 감각을 동원해야만 하나의 돌을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각을 말함이다. 몸각의 신경계를 최대한 확장하여 돌과 하나의 상상태로 연결하는 것, 바로 거기서 돌의 연금술이 탄생한다 할 것이다.
이행균의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고 스크럼을 짜듯 꽉 짜여 있었다. 우주, 인간, 순환 그리고 시간의 문제들이 미학적 의미로 무장해 등장한 작품들은 항후 조각가 연구에서 거론될 수 있는 작품들로 보인다. 돌의 선별에서 매스의 형성까지 어느 것 하나 제 손을 거치지 않는 작업 방법은 전덕제의 경우처럼 지난한 노동의 연속이다. 특히나 돌의 경우 떨어져 나간 파편만큼 시간의 겹이 쌓이는 것이기에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여준 거대한 돌 퍼포먼스와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들은 그가 한국 조각계에 던지는 작은 화두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과 작업에서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기도 했다. 여타의 예술이 그러하듯 미학과 철학이 앞서면 대중이 외면한다. 반면,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도 대중은 원하지 않는다. 조각가 이행균이 세상과의 접점을 시도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그가 최근 조각한 작품들은 어렵지 않다. 재질의 마티에르를 표현하는 방식과 조형의 형식도 쉬운 언어를 택하고 있다. 시각적으로 쉽다는 것은 형상의 사실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향취가 고루하지 않고 보편적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들에서 이행균은 전덕제와 같이 일상에서 조형을 길어 올렸다. 전덕제가 인형에 주목했다면 이행균은 친근한 식물성이다. 매끈하게 다듬은 가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조각품이 되고 있다. 이렇게 만든 작품들의 낱낱은 호감을 갖게 되고, 어느 새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아련한 과거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과거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작품에서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이행균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번 작품들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두 작가 모두 단일성의 작품이 아닌 일종의 ‘상황조각’을 연출하고 있단 점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완결점을 찾는 것이 근대조각의 특징이라면, 최근 조각의 흐름은 서사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상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전덕제와 이행균의 이번 작품들은 작고 아담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일상은 수채화 같기도 한 풍경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어른이 되어 상실해버린 순수의 표피가 거기에 있고, 또한 달리 보면, 어른의 세상을 동경하는 아이들의 욕망이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