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돌과 삶, 사유의 조각가
돌과 삶, 사유의 조각가
장석원(미술평론가, 전남대 교수)
20여년 간 돌을 다뤄온 조각가. 그는 어느 사이에 돌처럼 육중하고 든든한 존재가 되었다. 최근 그가 서울과 부산에서 보인 대리석과 브론즈, 대리석과 화강암을 결합하여 제작한 ‘가족’, ‘결혼 이야기’, ‘독서하는 소녀’ 등의 작품은 갤러리 공간이 요구하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감지케 하는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조각을 자신 만의 뚝심으로 밀어가고 있다.
이 전의 개인전을 통하여 그는 조각 작품으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 주었다. 2003년도의 ‘두개의 나’ 같은 작품은 단단하기 그지 없는 오석으로 제작된 나- 두 발로 선 채로 사색하는 인물과 해부학적으로 묘사되어 거꾸로 선 인물을 그리고 있다. 그 두 개의 인물은 같은 ‘나’이고 분리할 수 없으면서도 모순되고 있다. 그가 조각으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문제와 사색이 담겨 있다. 2006년도의 작품 ‘무사유’ 시리이즈는 그 사색의 여지를 더 진전시킨다. 목 잘린 반가사유상 또는 생각하는 사람처럼 육중하게 자리잡은 남자의 건장한 신체라든지, 두뇌 공간이 텅 비워진 채 추상화된 얼굴의 형태 등은 곧 그의 조각이 매스나 조형성 또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 ‘사유’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에로 이동하는 단서를 보인다. 근작 ‘생명-도시’에서는 달걀 형태의 깨진 틈 사이로 LED 광을 내뿜는 도시의 모습이 들여다 보인다. 그것은 도시이고 돌이며 개념이다. 그는 돌로서의 형태적 일류전을 넘어 사물과 개념으로 바뀌는 실험을 계속한다. 2005년도 작 ‘부유하는 섬’ 역시 내부에 전류로서 자석이 작동케 해 물 위의 돌이 계속 부유하도록 고안했다. 그는 돌을 사용하지만 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행균은 아직도 자신의 조각을 실험하고 있다. 돌과 브론즈를 조합하여 ‘독서하는 여인’을 만든 경우 역시 브론즈라는 재료로서 묘사할 수 있는 인물의 소조적 스킬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돌의 투박하고 묵직한 재료적 느낌을 가미시킨다. 물론 이러한 작품은 대중들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실려 있다. 그의 삶에 있어서 조각은 현실이었다. 끊임없이 작업을 이어 가야 했고, 그것이 예술의 참된 의미였다. 작업에 부여되어야 할 노동과 기술과 사유는 작품의 형성 과정에서 필요 조건이면서 동시에 일관성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과 그 진실을 전달하는 감동의 힘, 그것이 아직 미약하게 실험적이다. 어느 날 그 부분이 화산처럼 폭발하게 될 때, 그 모든 사유와 기술과 노동은 하나의 섬광처럼 그 자신과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
20년의 세월 속에서 그는 강관욱, 전뢰진, 김영원 등 굵직한 스승들을 만나면서 조각가로서의 입지를 다져 왔다. 그의 작품 속에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영향이 단편적으로 박혀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 만의 예술을 추구한다. 단단하게 더 단단하게, 성실하게 더 성실하게 나아간다. 그러나 더 겸허하게 더 솔직하게 문제의 본질에 부딪치기를 희망한다.
그는 돌 판에 가족을 부조 형태로 새겨 넣었다. 한번 새겨진 형상은 돌 그 자체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 남게 될 것이다. 돌은 그 단단함과 지속성으로서 불변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이 영원히 그 자리에 살아남을 것처럼…. 돌의 언어와 그 사이에 담기게 될 감각과 사유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남기 마련이다. 우리들은 그것들 사이의 조합과 불화합 사이에서 무엇을 얻게 될까? 그 미묘한 관계와 차이 속에서 예술을 느끼게 될까?
순수는 더 이상 제일의 예술 명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말해야 한다. 순수를 비롯하여 삶과 우리의 시대를…. 이제 우리 모두는 말해야 한다. 조각에 대하여 또는 예술에 대하여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그 가족들에 대하여도. 그 소리가 들리건 들리지 않건 그것이 우리들 시대를 흐르는 예술적 기류가 되고 있다.